국민의 부는 어디서 오는가?
흔히들 우리 민족은 대대로 농경민족이라고들 한다. (옛날엔 그랬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농업기술이 고대, 중세에 비해 시비법, 이앙법 등을 통해 농산물의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했던 조선시대야 말로 우리 역사에서 농업국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시대의 국민이 주로 생산하는 자원, 재화의 중심이 무엇인가부터 생각해보려고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중 한 명이었던 다산 정약용은 원목에서 “백성을 위해 수령이 존재하는가? 백성이 수령을 위해 태어났는가?” 하며 통치자의 이상적인 상을 제시하며, 여전론을 주장했다.
여기서 여전론이란 실학자들의 균전론, 여전론, 한전론과 함께 토지재분배와 관련된 이론인데 한 마을을 단위로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 경작하는 일종의 공동농장 제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 그때 당시의 기득권층들을 어찌 처리하려고 이런 주장을 했을까?
지금이야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하지만, 옛날에는 국가 안의 모든 땅은 왕의 땅이고 그 안에서 사는 백성은(귀족, 관리들을 포함하여) 왕의 백성이라는 왕토 사상이 모든 수취제도의 철학적인 시작이었기에 이론적으로만 보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잠시 시대를 뛰어넘어서 18세기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기계에 의해 노동자들의 삶이 점점 피폐해지기 시작했고, 1848년 독일에서는 엥겔스와 마르크스에 의해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라고 하는 공산당선언이 구 유럽의 세력들에 반(反)하여 일어나고 있었다. 결과론적으로, 소련과 동유럽의 소비에트 블록은 무너졌고, 1900년대 후반, 경제학계는 TINA(There is no alternative)라고 외치며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21세기가 된 지금, 우리 시대는 어떤가, 자본주의 시대를 대표하던 대표적인 금융기관들이 무너지며 연이은 주가폭락으로 세계의 경제가 위험하다고 하고 있다. 기관에서는 열심히 양적 완화를 하고 있으나 각 기업은 신용경색으로 도산위기에 처해있다. (..그렇다고 한다.)
이런 현상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건 무엇이고 앞으로의 추세는 어찌 될까?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주된 재화의 원천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농업이었고, 봉건시대 유럽에서는 사냥, 즉, 전쟁이었으며, 산업시대의 유럽에서는 공장의 기계, 자본주의 시대 세계에서는 금융이다. 각 시스템에는 모순점이 있었으며, 불평등이 생겼으며 그에 따라 불만을 품는 계층들이 생겼고, 그것을 극복하기위해 학자들은 여러 가지 주장을 했다. 17세기 조선 시대에는 토지개혁론, 봉건시대 유럽에서는 왕권강화와 전쟁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산업화 시대에는 공산주의를 통해 이를 극복하고자했다. 지금은 금융시대이다. 이전 세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부의 불평등은 이의 재분배를 원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복지론들이 나오고 있다.
그럼 이 시점에서 우리 시대의 부를 창출해내는 뿌리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정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자본주의 시대의 꽃이라고 하는 증권시장(stock market)에서 흔히들 중요하다고 하는 건 정보이다. 물론 그들의 물량적인 원인도 한몫을 하지만 그 정보의 소스가 빠르고 풍부한 외국인, 기관이 그 꽃의 꿀을 모두 취하고 있다. 결국 기존 금융시대의 기득권층이 정보를 독식하고, 이에 따른 정보격차가 심해지다 보면 새로운 사회적 계층이 위로 올라갈 기회는 적어질 것이다. 이러한 정보의 불평등 속에서 정보혁명에서 소외된 정보 거지(information homeless)라는 용어도 나오는데 이것은 다양성으로 대표되는 사회의 건강성이 제한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 정보화의 바람 속에서 소외된 계층이 없이 모두가 잘살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1970년 P. J. TICHENOR는 지식격차이론에서 지식격차가 계층 간의 영속적인 불평등에 어떤 역할을 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미디어(New media)를 방안으로 들었다.
2012년 지금 우리나라는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대선이라는 큰 행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모든 대선후보가 표면적으로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각종 복지이론을 들고와서 시민을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개중에는 과거 산업화시대의 하드웨어를 가진 채로, 21세기의 소프트웨어를 이식한 사이비(似而非) 복지론자들이 있음을 느낀다.
저변에 깔려있는 순간순간 변화를 반대하는 구시대의 목소리가 이 몇 달을 견디지 못하고 두껍게 칠한 화장틈새로 속살이 삐져나오고 있으나, 일단은 다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달콤한 공약들을 내세우고 있다.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복지론 역시 구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일 뿐이다. 우리 1900년 후반 세대도 결국 다음 정보의 시대를 열기위한 기초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나는 기득권층이 되기 어려울 것이며, 우리 세대 역시 전 인류의 역사로 봤을 때 극히 미진한 세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이번 대선은 정보화시대를 맞이하는 향후 100년의 계획에 있어서 중요한 이벤트라는 점이다. 물론 이번에 도약에 실패한다 해도 정반합으로 대표되는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훗날, 적어도 우리 세대는 역사의 흐름에 반하는 세대로 비치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다.
아침에 신문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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